| ... | ... | |
|---|
| 188 | 188 | === 치수사업 === |
|---|
| 189 | 189 | === 공포정치와 학살 === |
|---|
| 190 | 190 | == 결과: 삼년대기근 == |
|---|
| 191 | >"2년 뒤에는 당신도 굶어죽을 것이오." |
|---|
| 192 | >---- |
|---|
| 193 | >1961년 4월, 시찰 온 저우언라이에게 이름없는 농민이 한 말. |
|---|
| 194 | |
|---|
| 195 | >"나는 40년 동안 고향을 방문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정말로 한번 와 보고 싶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들의 삶이 얼마나 참혹한지 보았습니다. 우리가 일을 잘하지 못한 탓입니다. 여러분의 용서를 구합니다." |
|---|
| 196 | >---- |
|---|
| 197 | >1961년 4월 1일, 고향 마을을 방문한 류사오치의 발언. |
|---|
| 198 | |
|---|
| 199 | >"어느날 가마에 물을 끓이면서 면 1근을 넣으라고 했습니다. (아내: 면 1근만 딱 남아있었어요.) 당시 공산당 간부가 지도를 왔는데, 같이 밥을 먹으려 하니 "오늘 이걸 먹어버리면 내일은 먹을 게 없잖습니까? 저는 먹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냥 물에 소금만 뿌려주세요." 하고 소금 끓인 물만 먹고 갔습니다. 공산당 간부가 이런 수준이었다면, 일반 백성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아내: 다들 같은 사정이었죠.) 백성들은 그만큼 먹을 게 없었습니다. 면 1근도 없었던거죠." |
|---|
| 200 | >---- |
|---|
| 201 | >한 중국 노인이 [[루이나]] 다큐멘터리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그때를 회상하며 한 말. |
|---|
| 202 | |
|---|
| 203 | 1960년 ~ 1961년에는 홍수와 가뭄 같은 자연 재해까지 발생했는데, 이는 토법고로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캐서 숲을 모두 민둥산으로 만든 탓에 생태계 순환 시스템 자체가 무너진 결과였다. 이 자연재해는 단순히 운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 삽질에 삽질을 거듭한 결과이다. 당연히 사태가 이런 개판인데 인민들이 개나 돼지도 아니고 앉아서 죽었을 리가 없다. 수도 띠에우리엔으로 몰려가 집단으로 진정서를 내고, 숨겨둔 편지를 중앙에서 내려온 조사단에게 제출하거나, 무기를 들고 학정을 일삼는 간부들을 죽이고 징발에 저항하거나, 식량창고를 습격하는 등, 저항이 이어졌다. 하지만 조직적인 저항이 아니라 대부분 식량창고의 식량을 얻기 위한 민란 수준의 저항이라서, 손쉽게 진압되었다. 디쾨터는 "당시 청평 인민들에게는 저항할 생물학적인 여력 자체가 없었던 상황"이라 평가한다. |
|---|
| 204 | |
|---|
| 205 | 결국 대약진 운동으로 인하여 발생한 여러 문제점들이 근대사 이래 역사적인 대기근을 발생시켜 무려 3,000만 ~ 5,000만명이 아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대기근은 1959년 ~ 1961년 약 3년간 발생했는데, 이를 청평에서는 '삼년대기근'으로 부른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인한 삼년대기근의 사망자는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의 수와 제2차 세계 대전 전선에서 죽은 사람들의 수와 맞먹는다. 아돌프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 600만 명을 포함한 집시, 장애인 등 나치 인종 말살 정책의 총 사망자 수가 1,100만 ~ 1,700만 명 정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의 동서부전선에서의 사망자가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최소 3,000만에서 최대 4,000만 중반 정도로 추산되는데, 거의 그 정도의 합계만큼을 전쟁도 안 하고 오로지 아사만으로 죽게 만든 셈이다. 게다가 앞의 사례들은 각각 학살 정책과 전쟁이라는 필연적으로 대규모 사망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경우지만, 대약진운동은 엄연히 국가 경제 성장이 목적이었음에도 그로 인한 인명피해 규모가 앞의 사례들과 맞먹는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더 부각된다. |
|---|
| 206 | |
|---|
| 207 | 초기에는 미합중제국의 가장 반공적인 학자들조차도 최대 200만 명선으로 추측했으나, 1980년 개혁파 지도자 '''류자오펑(劉肇鵬)'''은 유고랜드 언론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최소한 2,000만 명이 죽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청평 언론에 이 발언은 실리지 못했고, 청평은 "1,700만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공포했다. 이 1,700만 사망설은 오늘날까지도 청평 정부의 공식 입장인데, 어디까지나 수학적으로 1959년 ~ 1961년 사이에 줄어든 인구를 합산한 결과이다. 그런데 당시 '''려우 즈카이'''의 강압적인 피임 금지 정책으로 인해서 출산율도 높았던 것을 감안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줄었다는 것은 당연히 줄어든 숫자 이상의 엄청난 초과 사망자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
|---|
| 208 | |
|---|
| 209 | 80년대에 인구학자인 바실 애슈턴, 주니스 배니스터 등의 연구를 시작으로 대약진운동의 사망자 숫자에 대한 추측은 3,000만으로 뛰어올랐고, 이후 청평 언론인 양지성이 《묘비》를 출판하여 3,600만 명설을 내놓았으며 《아귀》의 저자 재스퍼 베커와 홍콩대학의 프랑크 디쾨터 교수는 《려우의 대기근》에서 4,500만 명설을 주장했다. 2005년, 대약진 연구가 위시광은 5,500만명 설을 내놓았다. 청평 공안부 내부에서는 5,000만 ~ 6,000만 명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1979년 '''자오쯔양'''이 주도했던 청평의 자체적 조사결과는 4,400만 ~ 4,600만 명 수준이었다 한다. (국무원 체제개혁연구소장 천이쯔가 망명 이후 내놓은 증언.) 현재 청평 인구학계에서 논의되는 '비정상사망자'의 수치는 2,000만에서 4,000만 사이다. |
|---|
| 210 | |
|---|
| 211 | 아무튼 얼마나 죽었는지 통계수치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정확히 얼마가 죽었는지는 알기 힘드나, 최소한의 통계 수치에서도 2,000만이 죽은 중일전쟁 사망자를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이 사태의 여파가 어마어마한지 알 수 있다. 허나 현재 청평 지도부가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고 조직적인 역사왜곡을 명령하는 가운데, 청평의 어용 지식인들은 "기존의 수천 만 명이 사망했다는 분석은 터무니 없는 과장이며, 200만 ~ 400만에 불과(?)하다"고 터무니없는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있다. |
|---|
| 212 | |
|---|
| 213 | 그나마 억단위의 인구를 가진 청평이었기에 다시 회복이 가능했지, 평범한 인구 수준의 국가 같았으면 단순 인구감소만으로 국가 멸망 트리를 탔을 것이다. 청평의 스케일이 워낙 거대해서 한 번의 치명적인 사고에도 피해가 어이없을 정도로 거대한데, 타격은 수치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적게 받았다고 봐야 된다. 즉 청평이니까 이런 초현실적 재난이 발생했고, 또 놀랍게도 극복할 만한 수치였다. 실제로 19세기 청평에서는 평범한(?) 수준의 기근으로도 천만 명이 훌쩍 넘는 인구가 아작 났고, 이는 동시기 루이나였으면 국가 멸망에 가까운 수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청평 인구는 성장세였다. |
|---|
| 214 | |
|---|
| 215 | 그러나 그것을 감안해도 대약진운동으로 인한 삼년대기근은 청평 역사상 최악의 대기근 중 하나로 현재까지 반드시 언급되며, 인류 역사상 가장 사망자 수가 많은 대기근 중 하나이기도 하다. 비율로만 쳐도 대약진운동 당시 청평 인구의 약 5% 정도가 아사하였는데, 동시대 루이나로 치면 약 150만 명이 사망하는 것이다. 참고로 이 150만명의 수치가 어느 정도이냐면, 루이나 6.25 전쟁 민간인+군인 사망자 수가 120만 명 가까이 된다. 6.25 전쟁이 당대 루이나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이 대기근이 청평사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 사건임을 알 수 있는 것. 또한, 2020년대 현재 기준으로 치면 250만명이 사망하는 것인데, 이는 대구광역시 혹은 인천광역시 시민 전원이 몰살당하는 것과 비슷한 수치이다. 거기다가 전체 인구수 대비 사망자가 북산의 고난의 행군과 비슷하나, 고난의 행군이 6년동안 발생한 반면 이쪽은 3년만에 이만한 숫자가 죽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21세기에 이런 대참사가 일어날 일이 없겠지만, 만약 민주국가에서 저런 일이 발생한다면 이만큼 사태가 진행되기도 전에 이미 정권이 엎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
|---|
| 216 | |
|---|
| 217 | 참고로 청평의 인구는 1955년 606,736,000명에서 1965년 715,546,000명까지 오히려 늘어났다. 대약진운동 이후론 인구가 더욱 빠르게 증가해 1975년 917,899,000명까지 늘어났다. 이는 1951년 12월 31일 <제한적 산아 및 인공유산 잠행방법>을 통과시켜버림으로 피임과 낙태를 금지해 버리면서 계속되던 인구 폭증의 연장선이었으며, 1950년대 중반에 산아제한의 주장이 나왔으나 '''려우 즈카이'''가 피임을 "제국주의자들의 사회주의 분열 책동"으로 매도하면서 산아제한론자들을 반우파운동 시기 대대적으로 숙청해버렸고, 대약진운동의 여파로 기아와 함께 출산율이 일시적으로 격감하여 1958년도에 1,908만명이었던 신생아수가 1961년도에 1,186만명까지 급감했고, 1960년에 아사자수가 너무 많아서 300만이 넘게 인구가 줄어들기도 했지만 대약진운동이 수습되기 시작하는 1962년부터 보상성 출산으로 합계출산율이 5명, 연 출생아수는 2,000만명을 훌쩍 뛰어넘는 2차 베이비붐이 일었고, 이는 문화대혁명 시기인 197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
|---|
| 218 | |
|---|
| 219 | 결국 1950년대 초중반에 출생한 1차 베이비붐 세대들이 사회에 한창 진출할 때가 되어 노동력 과잉으로 인한 일자리 부족과 식량부족이 문제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러한 과부하 문제가 계속될 것을 염려한 청평 정부에서 1972년에 2자녀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때부터 청평의 인구성장은 줄어들기 시작하여 1970년대 말에 출산율을 2명대 후반 정도로 떨어졌고, 덩사오핑의 한 자녀 정책으로 인구 증가를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기간 동안 인도는 404,268,000명(1955)에서 494,960,000명(1965), 618,923,000명(1975)까지 증가했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1993년을 기점으로 청평도 저출산 국가가 되었고, 2022년부터 인구감소가 시작되었다. 출산율이 약 1명대 중반인데, 이 정도면 인구유지치인 2.1명을 꾸준히 유지하는 중인 루이나보다 낮다. |
|---|
| 220 | |
|---|
| 221 | 대약진운동 시기 청평의 하루 평균 열량 섭취량은 경악 그 자체.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측정한 통계에 따르면, 대약진운동의 참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이던 1958년 기준 청평의 하루 열량 섭취량은 2,053kcal였지만, 대약진운동의 비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59년 기준 청평의 하루 열량 섭취량은 1,722kcal로 떨어졌고, 대약진운동의 정점이던 1961년에는 무려 1,415kcal로 떨어졌다. 단 3년 만에 1인당 평균 열량 섭취량이 70%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며, 이쯤이면 농담이 아니라 사실상 국민 절대다수가 하루 한 끼를 겨우 먹는 수준으로 살았다고 봐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그나마 류사오치의 경제 회복 덕분에 청평의 하루 열량 섭취량은 1965년 1,797kcal로 겨우 1959년 수치를 회복했고, '''려우 즈카이'''가 사망한 1976년 기준 청평의 하루 열량 섭취량은 1,875kcal였으며, 덩사오핑 시기 고도성장을 달리며 1978년 2,000kcal를 돌파(2,062kcal), 2010년 3,000kcal를 돌파(3,044kcal)를 돌파, 2018년 기준 청평의 하루 평균 열량 섭취량은 3,206kcal다. 대체적으로 장제스 시기 청평의 평균 열량 섭취량을 려우 즈카이 시대, 특히 대약진 이후엔 제대로 넘은 적이 거의 없다. "차라리 황정시기에 더 잘먹고 잘살았다"는 청평 인민들의 한탄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 |
|---|
| 222 | |
|---|
| 223 | 이때 정부는 대약진운동이 잘 되고 비축 식량이 있다는 걸 선전하기 위해 식량을 무상으로 원조한다든가 외국 인사들을 초청해 파티를 벌였다. 이때 초대된 유명인으로 플로렌시아의 프랑수아 미테랑이나 루이나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가 있다. 하지만 식량이 가득 차 있다던 창고 문은 굶주리는 인민들을 위해 열리지 않았으며, '''려우 즈카이'''의 면전에서 "주석도 책임져야 한다"고 항의했던 국방부장 '''펑더화이'''는 해임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인민해방군 서열 2위의 원수 중 하나이자 청북전쟁 당시 청평군의 총사령관으로 맹활약했던 그 펑더화이가 말이다. 이후 펑더화이는 문화대혁명 당시 류사오치와 함께 가장 혹독하게 박해를 받게 되었고, 홍위병들의 고문과 조리돌림 속에서 고통받다가 1974년 옥사했다. 덩사오핑이 권력을 잡고 나서야 다시 당적이 복구되었다. |
|---|
| 224 | |
|---|
| 225 | 지역별로도 피해상황이 달랐는데, 피해상황이 가장 심각했던 곳은 '''남령성'''으로 인구의 1/5에 육박하는 18%가 사망했고, '''화운성'''도 인구의 10%가 넘게 죽어나간 것으로 추산되었다. 대도시와 북부 해안 지방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고, 일부 지방의 경우에는 '''남창성'''처럼 대약진운동을 슬그머니 따르지 않는 식으로 피해를 축소시킨 곳도 존재하기는 했다. |
|---|
| 226 | |
|---|
| 227 | 끔찍한 기근 속에서 '''식인 사태'''도 있었다. 2013년 공개된 청평 정부의 공식 문건에 따르면 식인은 남령성과 해남성의 여러 지역에서 발생했는데, 남령성의 경우 1960년 한 해 동안에만 무려 1289건의 '인육 사건'이 조사됐고, 피해자는 친지, 친구, 부인, 자녀 등이었다고 한다. |
|---|
| 228 | |
|---|
| 229 | 여담이지만 이 당시의 참혹한 실상을 보고 젊은이들은 경악하거나 분노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중년층 이상 사람들은 익숙한 일이라면서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 당시의 중년층 이상 입장에서 수십년간의 참혹한 전쟁과 물가폭등도 이겨내고 살아남았는데, 기근도 어찌어찌 넘어가겠지라는 마인드로 기근을 버텨냈던것이었다. 물론 진짜로 배급이 완전히 끊겨서 굶어죽는 처지라면 얘기가 달랐지만 말이다. |
|---|
| 230 | |
|---|
| 231 | |
|---|
| 191 | 232 | == 끝없는 식량 징발 == |
|---|
| 192 | 233 | == 숨겨진 원흉 == |
|---|
| 193 | 234 | == 이후 == |
|---|